토람이 이야기

안녕 토람아…
토람이 이미지
안내견 토람은 6살박이 골든 리트리버다. 2살 때 뉴질랜드에서 건너와
3년 넘게 한빛 맹학교 교사 전숙연씨의 눈이 되어 사랑 속에 살아온
토람이가 지난 2001년 8월 24일 악성 혈관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숙연씨와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온 토람이가 병을 확인하고 수술받은 지 꼭 67일만의 일이다. 개란 동물은 참으로 대책없이 충실하기만 하다. 즐겁게 꼬리치고 걷고
달리다가 결국 쓰러지고 나서야 그 동안 많이 아팠노라고 얘기한다.
전숙연씨도 그 것을 알기에 더욱 토람이에게 미안함과 원망스러움이
컸을 것이다. 수술 후 토람이는 안내견학교에서 생활했다. 투병 중에도
수 차례 위급한 순간을 맞이하였으나 안내견학교 직원들이 돌아가며
밤새 토람이를 지켜보며 함께 해주고 안내견 생활 중에 한번도 먹어
보지 못했을 갖가지 맛난 음식들을 먹이며 보살핀 덕분에 그때 그때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점점 더 병은 깊어 갔다.
토람이가 숨을 거두던 날 이었다. 평소라면 주말 밖에는 시간을 낼 수 없던 전숙연씨가 금요일인 이 날 저녁 공교롭게도 토람이를
만나러 안내견학교에 왔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토람이는 전숙연씨의 품에서 잠들듯이 마지막 눈을 감았다. 마치 엄마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아침 토람이의 몸은 안내견학교의 뜰 앞에 묻혔다. 생전에 덮었던 이불과 개껌을 함께 넣은 작은 관이 묻힐 때 전숙연씨도
우리 직원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토람이의 다시 태어남을 기원했다. 전숙연씨는 말한다. 토람이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안내견 토람의 죽음 앞에 우리가 이토록 슬퍼하는 것은 어떤 인간보다 큰 사랑을 전하고 떠난 한 마리 개의 일생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토람아!
토람이 이미지
네가 떠나던 날은 절기마저 처서로 접어 두 달여 여름 내내 아프기만 했던 내 고통의 짐이
너를 떠나 내게 옮겨지던 아픈 날이었단다. 그나마도 우리 토람은 아름다운 이별을 엄마에게
가르치며 숙제를 남겼지. 토람이 처음 엄마에게 왔을 때 엄마의 삶에 이런 멋진 만남이 준비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한번도 꿈꿔 본적이 없었구나. 우리는 그저 그렇게, 정말 그저 그렇게 아주 조용히 만났지.
아직 내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누구에게도 돌릴 수 없어 하면서도 실명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기까지 걸린 4년의 시간을 바꿀 만큼 멋진 친구가 내게 나타나리라고
엄마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니? 평생 한번도 혼자라는 삶이 없었기에 늘 긴장하고
두렵기만 했던 한 학기가 끝나던 날 토람을 만났구나.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기품
있는 녀석으로 말이야.
실명후의 위축된 나의 사고는 마냥 수동적이어서 어른다운 처신일랑은 생각조차 못하며 서성거렸는데, 겁먹은 나에게 먼저 와서
안겨 주던 너는 온몸으로 엄마를 위하여 생을 소진했구나. 뜨거운 햇빛이 우리를 쪼아도 돌연 소나기가 억세게 우리를 때려도,
무섭도록 혹독한 추위가 온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던 날도 우리는 얼지 않았지. 오히려 더욱 뜨거운 입김을 호호 불어대며 한
몸으로 서로를 격려하여 한남동의 비탈과 빨래골의 둔덕을 이리 저리 넘어, 드디어 학위를 받던 날 엄마의 온 집안 식구들은 엄마의 학위가 네 몫이라며 칭찬하였고, 엄마도 자랑스러워 네가 엄마의 막내 아들임을 졸업 앨범으로 증명했단다.. 토람아. 엄마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들 네가 내 곁에서 떠나갔음을 돌릴 수가 있겠니? 한탄만 하려는 것은 아니야. 토람이 그 눈부신 미소로 엄마에게 삶의 또 다른 보상을 알려준 것처럼 엄마도 토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미소를 보내야겠지? 다만 기막히게 멋진 널
만난 그 행운을 잃은 서운함이 못내 섭섭하고 그리워서 너의 빈자리를 서성거린다.
토람이 이미지 돌이키면 한심하리만큼 미숙한 나에게 너는 너무 멋진 신사였구나. 불안한 첫 만남을 놀랍도록 침착하게 인내하며 기다려 주었고, 덕분에 그런 긴 터널 속에서 우리의 우정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싹틀 수 있었구나. 정말 미안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했었니? 너랑 함께라면 나는 나의 실명 사실조차 가끔은 잊을 만큼 생각에 몰두하면서 길을 걸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야심한 밤의 정적조차 사랑할만한 용기를 내었단다. 토람아.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게 네가 그립구나. 네가 보고싶어. 너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 온통 눈물로만 젖는 지금의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토람이가 좋아할 만한 그 모든 음식 따위를 먹으면서도 네 버릇 나빠진다면서 짐짓 너를 모른 척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고, 밤이
이슥하여 네가 DT를 원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일에 열중하여 자정을 넘기기도 하였고, 비가 몹시 오던 날은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토람아 제발 여기서 하면 안되겠니?” 하던 일… 결국 우리 토람의 올곧은 성격이 엄마의 게으름을 무색케 하며 원칙대로
하였으나 씁쓸하게도 나를 원망하는 눈초리 하나 보내지 않던 순진무구한 네가 그리워서 온통 가슴이 메어지기만 하는구나. 꼬리를 부채살 마냥 근사하게 펴고는 공작처럼 우아하게 걷던 네 곁에서 못생긴 엄마도 더불어 공작이 되어 얼굴 하나 가득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 걷던 우리가 이런 헤어짐을 하다니. 이해 할 수 없는 시련이 또 나를 시험하고 있구나. 이럴 때 토람이 있다면 나는 나 이외의 토람 엄마로서 더욱 당당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닭을 찐다 치즈를 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으련만. 힘든 토람을 위하여 나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한심한 엄마였구나.
토람!
토람이 이미지
부디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환생하여 이승에서 다하지 못하였던 인연의 끈을 길게 길게, 아주
길게 이어 우리의 사랑을 완성해 보자구나. 아침을 열어주던 토람의 발자국도, 저녁의 일과를
마무리하던 너의 털 고르는 소리도, 정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기나긴 침묵 속이건만. 토람아, 엄마는 아직도 네가 엄마의 마음속에 깊은 자리 매김을 하고 있어서 언제까지나
든든할 것 같아. 귀를 기울이면 온통 네가 남긴 발자취들로 아직은 무성한 주위가 토람엄마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죽음에 이를 만큼 힘든 순간에서도 너를 보낼 나의 뒷 시간을 걱정하여
나를 기다려 주었던 네게 나는 또 한 수 배우면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숙제를
풀어야겠지? 이별의 순간에서조차 걱정하던 엄마가 꼭 쥔 토람의 손을 잡고 해 줄 수 있었던
마지막 말도 결국은 남은 나를 한 위안일 뿐.
토람아, 사랑해. 부디 엄마 걱정 말고 편히 쉬렴. 이제 우리는 어디서 만나지? 토람이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 토람아, 정말 사랑해. 엄마는 정말 잘 살 수 있어. 토람이와 살던 대로 잘 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정말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어. 이제 토람은 엄마가 지켜줄께. 오늘밤은 유난히도 짙은 가을 벌레 소리가 서글프기만 하구나. 네가 엄마에게 보여준 그 미소만큼 엄마도 토람에게 웃을 수 있도록 네 미소를 배우며 잘 살 수 있을 거야. 토람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 모두는 토람의 사진첩을 만지작거리며 반짝이는 너의
순한 눈을 찾고 있단다. 사랑해 토람아. 영원히.
2001년 8월 24일 토람을 떠나 보내던 날. - 전숙연 - 다른 이야기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