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섭이와 보리 이야기

형섭이의 등교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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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형섭이는 첫 수업이 8월 30분이었기 때문에 7시 30분에 시장
앞에서 마을 버스를 기다렸다. 보리를 아는 꼬마아이는 보리에게 아침
인사를 했고, 마을버스가 도착하고 형섭이와 보리가 탈 때까지 동네
아저씨는 문을 잡아 주셨다. 마을버스에서 보리와 형섭이는 맨 앞자리가 지정석이다. 형섭이는
보리에게 자리를 잡아주고, 발에 밟히지 않도록 꼬리를 보리의 발
아래로 모아주는 것도 잊지 않고 챙겼다. 잠시 후 병원 앞에서 버스를
내려 학교까지 걸어갔다. 보리와 형섭이는 훤히 보이는 길을 달리듯이
씩씩하게 걸어간다. 학교 앞 큰 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교통경찰 아저씨가 신기했는지 보리를 만지려 한다.
하지만 보리는 눈길도 안주고 신호가 바뀌자 늠름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그 경찰 아저씨는 안내견이 일할 때는 어떻게 예뻐해 주어야 하는지 아직 모르셨나 보다.
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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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업은 문학관 2층이다. 형섭이는 시간표 짜기의 귀재가 됐다. 월요일은 수업도 없는
‘주4파’에다가 공강은 거의 없으며 강의실도 문학관에서 모두 해결된다. 심지어 오늘 수업은
모두 같은 강의실이다. 지난 학기엔 강의실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어서 많이 힘들었단다.
형섭이의 자리는 늘 강의실 맨 앞자리이고, 당연히 보리의 자리는 늘 그 옆이다. 형섭이는
보리를 위해 따뜻한 깔개를 깔아 주었다. 형섭이의 큰 가방 속에는 보리 깔개, 보리 껌,
보리의 D.T(Dog Toilet, 배변용 봉투), 보리 털(흐흐)…, 모두 보리를 위한 것밖에 없다. 오늘 수업은 실용영어강독과 실용영어회화. 형섭이는 수업 내용을 Braille Note(점자 입력기)
로 입력하고, 교수님의 강의는 녹음기에 녹음했다가 집에 가서 정리한다. 교재도 유인물도
모두 스캐닝 한 후 음성으로 변환하여 공부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보다 집에서 해야 할 일이
훨씬 많다. 특히 첫 수업은 긴 글들을 많이 읽게 되는 강독 수업이라 미리 내용을 점자로
변환해 오지 않으면 수업을 듣기가 힘들다. 다행히 교수님께서 한 주 미리 자료를 보내
주기로 하셔서 부지런한 형섭이가 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긴 시간 이어지는 수업에도 보리는 얌전히 엎드려있다. 가끔씩 고개를 들어 형아가 수업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형섭이는 쉬는 시간에도 보리의 D.T를 잊지 않고 챙겼다.
이른 아침부터 연이은 영어 수업으로 우리는 모두 배가 고팠고, 학교 앞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안내견과 같이 가기에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가 식당이라고 했다. 주로 학교 식당을 이용하는데, 다행히 우리가 간 곳은 아주머니가 보리의 이름까지
기억하시고 잘 챙겨주셔서 형섭이는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후후~
형섭이네 집에서…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중고등학교 하교 시간인데다가 형섭이가 사는 동네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조그마한 마을버스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다행히 형섭이가 타고 내리는 곳이 거의 종점이라 늘 형섭이와 보리의 자리는 지킬 수 있었고, 그 복잡한 상황에서도 보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형섭이와 보리 이미지 형섭이네 동네는 하늘이 참 가까워 보인다. 형섭이네 집엔 보리가 놀 수 있는 옥상이 있어서
온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다만 2층 할머니가 계단에서 키우는 성깔
있는 강아지가 보리의 출퇴근길을 방해하지만, 형섭이는 보리를 잘 보호해 주었고 보리도 잘
참아 주고 있다. 형섭이는 부모님이 지방에 계신 터라 학교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지내고
있다. 때문에 보리는 형섭이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다. 아직까지도 부모님의 보호와 온갖 지원
아래서 생활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어린 형섭이는 혼자 모든 일을 꿋꿋이 해내며
지내고 있었다.
하루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와서 하네스와 자켓을 벗은 보리는 그간 참았던 애교와 장난기를 맘껏 보여주었고, 실컷 놀고
나서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이 들었다. 형섭이는 하루 종일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고, 내가 준비한 작은 선물에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오히려 내가 형섭이에게 너무 고맙기만 한데, 뭐가 서로 그리 고맙다는 건지….
뭐라 표현하긴 힘들지만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하루를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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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형섭이와 보리와의 하루는 우연히 얻어진 기회였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하루가 되었다. 처음 형섭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후로는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았다. 이런
얘기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이런 건 모르겠지…, 어떻게 대해야 할까…. 하지만 형섭이와 보낸 하루 동안 ‘형섭이는 다르니까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공부하는 대학생이었고 전혀
다른 것이 없는데, 뭔가 다르다고 생각한 것에서 서로 오해하고 서운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안내견과 생활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자원봉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견에 대한 일도 좋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안내견과 사용자의 생활에서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아쉬운 점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수업시간에도 함께 할 수 있는 도우미가 있으면 훨씬 편할 테고, 특히 혼자 생활하고 있는
사용자들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가족 같은 인연이 필요하지 않을까. 삼성안내견학교에 계시는 분이 형섭이를 챙기고 도와주시는 모습은 거의 가족과 같았고,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잠깐 달아올랐다 식어버리는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은근하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인연과 관심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 부족하기에
망설여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친한 동생 형섭이와 그의 동거견
보리로…. 이렇듯 나에게 소중한 하루를 선물한 형섭이와 보리에게 가장 큰 감사를 보내며, 늘 사랑으로 안내견과 사용자와 함께
하시는 삼성안내견학교 직원들께도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최선경 (안내견학교 자원봉사자) 다른 이야기 보러 가기